상단영역

본문영역

해삼 때문에 저승 문턱 세번 다녀와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조영자 해녀(84)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8.10 14:04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게 머리를 좀 손질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머리는 꼽슬이라 고대끼를 너사쓴디″
″???″
조영자 해녀와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고대끼는 미장원에서 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은퇴한 조영자 해녀의 삶은 기구하다면 기구하고 드라마틱하다면 정말 오뚜기 같은 삶을 살아온 삶이었다.
조 해녀는 1940년 서귀포시 영흥리(오늘날의 강정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서귀포시 영흥리로 중산간지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닷가도 아니었어요. 어릴 때 할아버지가 마을 구장(이장)을 하였는데 4.3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없어도 마을 책임자로 돌아가시고 그 뒤로 집안은 풍지박산(풍비박산)이 나버렸어요.″
″우리마을은 물질을 안하는 곳인데 외갓집이 법환동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열 다섯살 때 법환동에서 물질을 배웠어요" 
″완도에는 29세 때 첫 원정물질을 와서 30세 때는 딸 하나를 데리고 와서 정착했습니다.″    
조 해녀는 22세때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물 두 살에 결혼하고 딸 둘을 낳았는데 신랑이 바람을 피는 거예요. 새끼들을 지켜주라고 눈물로 호소해도 소용이 없어 스물 다섯에 이혼을 한 후, 딸 하나를 데리고 살다가 완도에  정착한 겁니다.″
조 해녀는 완도에 정착 한 후 악착같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먹고 살기위해 물질을 열심히 했습니다, 흑산도(신안), 조도군도(진도군), 나로도, 시산도(고흥), 금당도, 생일도(완도) 여기저기 남해안은 난바르(배에서 숙식을 하며 특정지역의 바다에서 4~5일씩 물질을 하는 것)를 안 다녀본 곳이 없어요" 
"젊었을 때라 무서운 것 없이 일했어요.″  
난바르를 다니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바다는 조도군도와 시산도라고 한다.
″조도는 전복이 많고 시산도는 해삼이 널려 있어요. 당시에는 해삼 가격이 싸서 큰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해삼을 전문으로 잡았어요.″ 
남해안의 바다 곳곳을 내 집 앞 같이 드나들었던 난바르 다닌 이야기를 부탁하자 특별한 것이 없다는 조 해녀는 ″난바르는 여름에만 댕긴디 보리쌀하고 젓갈, 된장을 꼭 가지고 댕게. 보리쌀은 각자 가져와서 합쳐서 밥을 해먹고, 바다에서 잡은 것을 된장하고 요리하면 반찬이 안 된 것이 없어(전복이나 소라는 물회를 하고, 미역은 생미역을 된장하고 무쳐먹었다고 한다) 물질이 이틀이나 사흘 길어지면 성게나 해삼을 가지고 마을로 가서 반찬하고 바꿔서 밥해 먹고 물질하고.″       
 해삼을 하루에 50kg까지 잡아 봤다는 조 해녀는 해삼 때문에 저승문턱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한다.
″제주 해녀들은 칠성판을 등거리에 지고 산다는 말이 있어요. 나도 칠성판을 지고 살았는디 마흔 일곱 살 때 소안도의 업자가 해삼을 잡아달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다이브(스킨스쿠버 다이빙)로 부탁을 해서 못한다고 했는데 한번만 해주라고 하도 부탁하길래 장비를 차고 물속에 들어갔는데 한번도 경험이 없어 가지고 작업이 끝나고 물속에서 그냥 나와 버렸어요. 그래서 죽었는데 물속으로 들어가면 살아있고 나오면 죽고, 다시 들어가면 살아있고 나오면 죽고, 어찌 어찌해서 완도에 도착했는데 완도와서 대흥장이라고 여관에 물을 받아 응급조치를 했는데 뜨거운 물에 화상을 크게 입었어요. 그래서 서울로 가서 석달간 병원 신세를 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또 한번은 해삼똥을 따라서 해삼을 줍고 있는데 숨이 차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강망(이각망, 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그물)이 쳐져 있어서 인자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쥐도 머리만 빼면 몸이 빠져 나오다』는 말이 생각나서 그물을 손으로 치고 한숨 쉬고 또 치고 한숨 쉬고 마지막에 양손으로 벌리니 그물이 조금 벌어져서 어찌어찌 빠져 나왔는데, 다른 해녀들은 인자 겁이 나갔고 어찌게 손도 못쓰고 나 죽었다고 부르르 떨고 있고, 그래도 용케 살어 나왔어요.″
″또 몇 년 지나서 해삼 똥을 따라서 해삼을 줍고 있는데 기분이 이상해서 보니 김발 나이롱 줄이 다리를 감아불었어요. 아차 싶었는데 마침 옆에서 같이 작업하던 동생이 풀어줘서 살아나오기도 했어요.″
여름철이면 해조류 채취를 위해 하루에 20km 씩을 걸어 천초(우무가사리)를 채취했다고 한다.
″여름이먼 중도리, 정도리(완도읍) 당인리(군외면)서 천초를 채취한디 새복(새벽) 네시에 인나서(일어나서) 당인리까지 걸어서 가. 그때는 차도 없고 길도 지금 같이 좋지도 안했어. 일찌거니 천초를 매서 바닷가에다가 널어 그래야 물이 빠지고 천초가 몰라. 그라먼 걷어서 짊어지고 걸어서 읍으로 와 갛고 도매상한테 바로 냄기제, 왕복 오십리가 넘는 길 인디 그때는 모두 그렇게 살어서 힘이 들었제마는 다 살었어.″      
열심히 산 조 해녀에게도 하나의 아픔이 있으니 하나 있는 딸이 오랜 시간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딸이 10년전부터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어요. 그래서 손주들을 제가 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다행이 지금까지는 잘 살고 있고 광주에서 살고 있어서. 애기들이 할머니를 모시고 광주의 보훈병원에 다니는데 다리가 아파서 어려움이 많아요.″
두 번의 고관절 수술로 다리가 많이 아프다는 조 해녀는 다리만 안아프면 좋겠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