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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대화 한 모금

#김지현
#완도가생각날때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8.3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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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첫 새벽, 여진이에게 내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해야만 했다. 머리에는 커다란 암 덩어리가 있고 이미 몸의 여러 부분에 그것들이 전이되었다고 말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나를 더 꽉 안아주었다. 그녀는 확률이 적다 해도, 파마머리가 다 빠져버린다고 해도, 내가 굳이 항암 치료를 받기 원했다. 그것이 완치가 아니라 생을 단 며칠 연장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 도 그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여진아, 사람은 누구나 죽어. 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느낀 것이 있다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거야. 나는 단 며칠을 살아도 의미 있는 존재로 살고 싶어. 그리고 너와 다시 만났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이미 충분해.”
“연수야, 포기하지 마, 나는 너 포기 못 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슬픔에 잠겨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할 사람들이 또 누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동생과 여진이를 제외하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우선 제일 친한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위로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어이 글쎄, 나 두 달 뒷면 죽는데.”
 “진짜? 나는 두 달도 못 버틸 듯.”
 서른 한 살에 여전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녀석과는 만날 때마다 누가 더 불행한지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다. 오랜만에 맥주 한 잔 하자고 저녁 약속을 잡고는 이른 아침에 나와 공원을 걸었다.
찬 기운이 있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그럭저럭 걸을 만한 날씨였다. 집 앞 작은 공원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노인들이 삼삼오오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나는 슬쩍 근처에 자리를 잡고 그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노인들은 바둑을 두면서 오늘 신문에 나왔던 세상 이야기부터 자기가 지금껏 살아오며 겪었던 경험에 이르기까지 중구난방으로 이야기를 이어갔고 연신 헛기침을 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말수보다 헛기침하는 횟수가 더 많아서 과묵했지만 소란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다들 생각보다 정정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거의 고함을 치듯 목청을 높여 말했다. 처음엔 그것이 격앙된 감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보고 있으니 단지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되고 크게 이야기했던 이유는 남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뜬금없이 할아버지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게 되면, 내 감정 표현 역시 온전히 할 수 없는 노릇이구나.’ 가끔씩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혼자 가슴을 치며 분을 삭혔던 나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조금 더 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려고 했었다면, 아마 내 마음도 더 잘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내 가슴을 쓰다듬어줬다.
주변을 관찰하고 난 뒤 책을 읽으려고 이어폰을 꺼냈다. 책을 읽기 위해서 굳이 음악도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끼는 이유는 지금 내가 귀를 막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상징과도 같았다. 가끔 이런 장치들은 우리 삶에 소소한 도움을 준다. 굳이 말로써 상대에게 내가 혼자 있고 싶음을 전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그런데 미처 왼쪽 귀를 막기 전에 할아버지 한 분이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아깝다. 일초만 더 빨랐어도 못들은 척 시치미를 뗄 수 있었을 텐데.
 “저기, 혹시 이 글자 좀 읽어줄 수 있을까요?”
주름진 할아버지의 눈에는 휴대폰 화면의 작은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래요? 그럼 말이 나온 김에 글도 몇 자 보내줄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의 눈이 기쁨과 설렘으로 빛났다.
 “내 새끼 공부 못하고 살도 좀 쪄도 된다. 건강하고 착하게만 커다오. 할아버지가. 이렇게 좀 부탁드려요. 이게 나이를 먹으면 새로운 걸 하기가 힘이 들어서 말이에요.”
나는 할아버지의 글에 귀여운 이모티콘도 함께 담아 보냈다. 할머니 생각이 났다. ‘내 새끼’라는 말에서 모락모락 정겨운 옛기억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멀리,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우리 손주가 이번에 나 보러 못 왔어요. 그래도 세상이 참 많이 좋아져서, 바다 건너에서도 바로 문자도 주고받을 수 있고, 서로 건강하게 잘 있다고 소식 주고 받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우리 같은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큰 위안이라고.”
세상이 좋아져서 지구 반대편에서도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세상살이가 참 빠듯해서 정작 사랑하는 사람의 손도 잡아주지 못할 만큼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할아버지, 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허허, 이 친구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저보다 많은 걸 보고 더 오래 사셨잖아요.”
 “그거랑 그거랑은 또 무슨 상관이야. 자기 인생 남이 말해서 무엇하나. 으흠. 저기 저 바둑판 보이죠?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저 바둑알이라고 보면 돼요. 우리는 비록 저 판에서 빠지는 순간 죽은 목숨이지만, 저 바둑판 안에 존재하는 경우의 수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요.”
낯선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내 머리를 퉁-하고 일깨웠다. 맞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규칙들에 따라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한 차례에 한 번씩, 모든 선택이 아니라 그중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수를 두면서 포기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바둑판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슈퍼 컴퓨터조차 모두 헤아릴 수 없는 경우의 수다. 바둑은 빠른 연산 이외에 통찰력과 순발력, 그리고 직관과 논리적인 추론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둑판의 경우의 수는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감정들과 사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삶에서는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인내심과 창의력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꿈을 꾸어야 인생을 살 수 있다. 
누구도 내 꿈을 대신 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거창하고 위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주 작고 소박한 목표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작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바둑을 몇 판 이겼다고 해서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꿈이란 프로그램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깐 알파고에게 진정한 승리란 “다음 번엔 한 번도지지 않을 거야.”하는 혼자만의 독백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인 셈이다.
 “바둑 한판 두실까요, 할아버지?”
 “바둑? 허허, 나 바둑 못 둬. 오목이나 두세.”
 우리는 삶이라는 바둑판 위애 놓인 작은 바둑알이다. 
누구도 그 가능성을 감히 헤아릴 수 조차 없다. 우리의 미래는 무한하다. 


김지현 칼럼니스트

사진=보길도의 해질녁/보길면네이버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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