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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법화원 앞바다는 천년 이상 청해라 불렸다

오는 2028년은 해상왕 장보고대사가 청해진을 설치한지 12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제 우리는 해상왕 장보고대사의 후예로서  진취적 기상을 드높이고 박애주의 펼쳤던 대사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청해진설치 1200주년에 걸 맞는 행사를 추진함은 물론 대사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국내외의 유적지 몇 곳을 소개한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9.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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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대사는 1200년전 한· 중· 일을 잇는 동북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떨친 무역상이자 군인이었고 정치가이자 항해가(航海家)이고 특히 당나라를 떠돌던 우리 유민을 거둔 박애주의자(博愛主義者)였다. 장보고대사는 대략 790년경 완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의 이름은 궁복(弓福). 궁파(弓巴). 장보고(張保皐)로 되어있고 일본의 역사서에는 장보고(張寶高)로 되어있다. 
대사는 일찍이 그이 친구이자 동료인 정년(鄭年)과 서기 810년경 중국으로 건너가 무령군소장(武令軍少將 우리나라의 대~연장급)으로 당시 산동성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 일가를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 공을 세우고 무령군을 물러나 문등현 해녕항 적산포(현 산동성 영성시 적산포)에 년수 500석의 광전(廣田)을 가진 법화원(法華院)을 설립하고 신라 유민을 도왔다. 
그러나 대사는 많은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잡혀와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이들을 구하고 해적들을 소탕하고자 서기 828년에 귀국하여 흥덕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 설치이후 대사는 적산법화원을 중심으로 동중국해안의 곳곳에 흩어져있는 신라유민들이 힘을 합할 수 있는 신라방을 정비, 새로이 건립하고 노예로 팔려온 신라인들을 보호하고 귀국을 돕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서기 836년 흥덕왕(興德王)이 승화하자 서라벌에는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였는데 839년(민애왕1년) 대사는 신라 조정의 정치싸움에 휘말려 5천여 군사를 서라벌에 파견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신무왕)을 왕으로 옹립하여 정치가로 활약하게 된다. 신무왕은 즉위한지 4개월만에 병사하자 세자 경응이 즉위 하였는데 그가 문성왕이다. 문성왕은 장보고대사에게 진해장군(鎭海將軍)이라는 직첩을 내리고 그의 딸을 차비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를 두려워한 신라 조정은 서기 846년(문성왕 8년) 염장을 청해진에 파견하여 장보고대사를 시해함으로써 자신의 부하였던 염장에게 청해진에서 피살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851년 청해진은 혁파되고 청해진의 유민들은 벽골군(碧骨郡 현 전북 김제시)으로 이주되어 벽골제축제와 수리에 강제 노역되었다.
장보고대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중국역사서인 『신당서』 ˝동이전˝과 ˝신라전˝에 실려있고 일본의 구도승 엔닌(圓仁)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와 『일본후기』 『속일본기』에 대사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실려있다.
장보고대사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일본의 하카다(博多津)의 고로칸과 다자이후(太帝府)에 보석과 도자기, 한약제, 먹, 종이, 유기, 유리제품등을 수출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법화원을 중심으로 동중국해안 여러 도시를 연결하는 운하를 관할하며 수로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물건을 운송하였으며 또한 연운항과 청도, 멀리는 절강성까지 항해하여 제주나 흑산도를 거쳐 청해진으로 들어오거나 제주를 거쳐 하카다(博多)로 향하는 뱃길로 동북아시아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고 우리 민족의 기상을 떨쳤다.

구림요지(鳩林窯址 사적 제338호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구림요지는 11,289㎡ 면적에 수십기의 요가 구릉지에 산재되어 있다. 이 유적은 8∼9세기 대규모 도기 제작장으로, 여기에서 제작된 사면편병, 일면편병, 주판알 모양의 유병 등 일상 생활용기류와 녹갈·황갈·흑갈색의 시유도기가 청해진에서 다량 출토되었다.
이곳은 영산강의 지류와 연결되어 서남해로 운송과 진출이 용이하고 주변에 질이 좋은 점토와 땔감이 풍부하여 도기 생산지로서 알맞은 여건을 갖춘 곳이다.

상라산성(上羅山城 전남 신안군 흑산면 읍동마을)
상라산성은 흑산도의 상라산 8부 능선에 반달 모양으로 축성된 석성이다. 이곳 사람들은 성(城)의 모양이 반달을 닮았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이라고 도 부른다. 
이 성과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이 9~10c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의 뒷쪽은 천길 낭떠러지로 산성이면서도 해로가 잘 조망되어 해로 감시에 용이하고 신라와 당을 잇는 해로의 중심에 놓여있어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한 곳으로 학자들은 장보고대사의 선단이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상라산성 서쪽의 상라산 정상에는 주변 해로의 감시를 겸한 봉수대를 설치하여 유사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던 제사 유적도 남아있다. 또한 읍동마을에는 사신들이 머물던 관사지(官舍址)와 무심사지(无心寺址) 가 남아있다. 
(계속)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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