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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천만번 멸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완도유배지 탈출 호남창의대장
추대된 추기엽 의병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9.1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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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끝자락 해남과 완도를 무대로 의병 활동을 전개했던 추기엽 의병장의 기억을 더듬는 것은 안타깝고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다. 이미 소개한 황준성 의병장과 함께 유배에서 탈출하여 의병 항쟁에 뛰어들어 남해안 일대에서 수차례 전투에 참가해 치열하게 싸운 추기엽 의병장을 만나보자.

대한제국의 장교 한일신협약에 의병이 되다

추기엽 의병장(1879-1909)의 고향은 담양 무정면 덕곡리이다.
그는 조선 왕궁을 지키는 친위대 제1대대 소속 장교로 근무했고 진위보병 제1대대 장교인 부위·정위·참령 등 여러 자리를 거쳐 정3품 통정대부 시위연대 향관으로 활약했으나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로 대한제국 주권이 위태로워지자 국권 회복을 위해 윤현보·이봉오 등과 함께 전북 익산에서 봉기한 황준성 의병대에 가담했다.
무장 항일투쟁을 벌이던 중 설(음력)을 맞아 잠시 고향으로 가던 중 일제에 발각, 체포되어 1908년 3월 전북 재판소에서 유향 10년형을 선고받고 완도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유향은 귀양살이를 의미한다.

유배지 탈출해 호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다

유배지에서 황준성·이봉오 등과 함께 탈출해 해남군 송지면 대둔사에 들어가 15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호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8년 대둔사를 근거지로 삼아 미황사의 황준성, 대흥사의 황두일 등과 함께 40여 차례 교전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1909년 7월 대둔사 전투에서 다수의 의병이 전사하자 책임소재로 다투다가 남창 해변가에서 부하 6명에게 암살당해 순국했다.
<독립유공자공훈록>제9권에 기록된 공적에 의하면,“추기엽 장군은 1907년 9월경 이봉오·윤현보·황준성 등과 함께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되었다. 1908년 3월3일 유형 10년형을 받고 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탈출한 추 장군은 해남·영암 일원에서 의병을 모집해 황준성이 대둔사에서, 황두일은 대흥사에서, 추 장군은 미황사에서 각각 수백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활동했다. 1908년 8월부터 해남 등 해변을 중심으로 40여 차례 활동했다”고 기록돼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 있는 의병장 추공기엽 기념비가 2004년 12월 24일 현충 시설로 지정됐다.
한편 무정면 덕곡리 추기엽 의병장기념비 옆에는 의병 전적지가 세워져 있다.
담양군이 세운 전적비에 따르면, 이곳은 1909년 5월 17일 의병장 추기엽 이하 40여 명이 덕곡리에 잠복 중 5월 16일 새벽 일본군으로부터 불시의 기습을 받아 약 5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의병 10여 명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쪽 끝자락에서 의병항쟁이 불타오르다

남쪽 끝자락 항일운동의 근거지는 대흥사 심적암과 북평 성도암과 미황사였다. 이곳이 항일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이유는 두륜산과 달마산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항일운동은 게릴라 전투 또는 비밀조직에 의해 운영됐고 이러한 전투방식은 산을 끼고 있었을 때 은신과 퇴로에 유리했다. 해남의 3곳 사찰이 항일운동 근거지가 된 것은 1907년 조선 군대의 해산으로 일어난 한말 마지막 의병투쟁부터이다.
1909년 접어들어 조선의 의병활동은 일본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거의 시들어가는 반면 호남 의병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에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호남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들어가고 이로 인해 남도 의병들의 활동 근거지는 해남과 완도 등 남해안 일대로 국한된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의병들의 근거지가 중국 동북아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해남군과 강진, 영암, 완도, 진도 등은 의병활동의 무대가 되고 그중 마지막 의병투쟁지가 대흥사와 심적암이다. 당시 해남과 완도에서 활동한 의병의 규모는 해남과 영암에서 주로 활동했던 추기엽 의병장의 부하가 450여명, 이덕삼 200여명, 황두일 120여명, 황준성 150여명, 강성택 20여명 등 940여명에 이른다.
이중 두륜산과 달마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던 의병들의 주요 아지트는 두륜산 투구봉 아래였다.
이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많아 숨기에도 좋았고 전투 시 엄호에도 유리해 의병들의 거점지로 이용됐다. 특히 이곳은 인근에 성도암이 있어 식량조달이 용이했고 투구봉과 성도암 산봉우리에서는 왜군의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투구봉 인근 바위틈에 거주했던 의병들에게 식사를 가져다준 이들도 성도암 스님이었다. 의병들의 은둔지이자 식량 제공 처였던 성도암은 이 같은 인연으로 일본군에 의해 건물 8채 중 6채가 전소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다. 성도암 인근 두륜산에서 주로 산악 게릴라전을 벌이던 이때 의병들은 일본군과 숱한 전투를 벌이며 그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이때 해남에서는 황두일과 추기엽 등이 북평면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각각의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군인출신인 황준성 대장을 중심으로 연합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통일된 의병부대는 성도암 전투에서 왜군에 밀려 미황사에서 재집결을 하였다. 이때 의병수는 60~70으로 줄어들었다.
미황사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의병들은 1909년 음력 7월8일 대흥사 심적암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의 이동 노선이 발각되면서 다음날 새벽 4시 일본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흥사 심적암 전투에 대해 <전남폭도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09년 음력 7월 8일 밤, 해남수비대장 오시하라 대위 이하 22명, 경찰관 3명, 헌병 4명이 적도 토벌을 목적으로 대흥사로 출동했다. 1909년 7월 9일 오전 4시 절을 포위 공격했는데 적도는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전멸했다. 적 22명을 죽이고 8명을 포로로 했으며, 화승총 47점, 군도 5점을 노획했다. 9월 18일 수괴 황두일의 부하 21명, 19일 4명이 해남수비대에 투항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 심적암 스님들도 죽임을 당하고 투항한 의병들도 교수형을 당하였다. 또 대흥사 심적암은 이때 불에 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 완도에 근무하면서 남창을 거쳐 성도암과 미황사를 거쳐 두륜산 자락을 오갔다. 심적암 전투는 알고 있었지만 의병장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유배에서 탈출하여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의병장들을 미처 알지 못했고, 모르니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역사교사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남도민주평화길 답사를 진행하면서 늦게나마 남도의병장들을 알게 되고 설명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또 황준성, 황두일 의병장에 이어 추기엽 의병장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추 의병장의 고향에는 기념비와 전적비를 세워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흥사 입구에 호국의병 충혼탑을 세워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의병 22명의 죽음과 패전을 했던 심적암은 건물이 전소되어 없어지고 성벽 일부만 남아있다. 그것도 성벽이 무너져가고 있고, 초라한 안내판이 퇴색되어 서 있다.
하루빨리 심적암 전투지를 복원하고 안내판을 재정비해서 찾아오는 탐방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록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여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민족정기가 바로 서고 계승될 것이다.


김남철 본보 시론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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