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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쓰는 글, 세상에서 가장 쎈 글을 쓰는 남자

다음 포털 한땀한땀 심층탐사보도 완도해녀이야기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장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3.10.12 15:42
  • 수정 2023.10.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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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을 돋보이게 하는 텍스트를 꼽으라 한다면, 각 필진들의 글을 비롯해 감성적인 이들에게 잘 읽히는 신복남 기자의 야생화 이야기, 새로운 완도의 이야기를 전하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의 글이 좋아 보이는데, 원픽(하나만 고른다면)은 유영인 원장의 글 같다.


권력자를 향한 쓰디 쓴 글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사물의 본질과 핵심, 객관적인 면을 본 후, 언론적 정의를 발휘하면 되니까. 어려운 것은 현장을 누비는 것. 한 가지 주제의식을 갖고 십 년 이상 깊이 있게 연구하며 현장을 누비는 전문기자. 그런 이들이 데스크보다도 언론계의 전설로 불리는데, 그들이 발로 쓰는 글이야말로 글 중에서 가장 힘이 세다.


지금 해녀라고 한다면, 꽃다운 나이에 물질을 배워 젊은 청춘을 바다와 함께 보냈다는 말인데, 아무리 물질의 귀재라곤 한다지만 바다는 생사를 넘나들만큼 언제나 데드라인, 사선이다.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여느 어머니들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사셨다는 것.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줄 수 있다면, 본보에서 내건 '당신의 눈물은 우리와 같습니다'와 부합한다.


그 보다 더 힘든 것은 취재를 하고싶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없다는 것. 이들은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데, 그 만큼 교감과 공감이 되지 않으면 그들의 가슴을 열 수 없다는 것으로.


그 만이 할 수 있기에 그래서 대단한 것.


세상은 특출난 지도자에 의해 변혁되지 않는다. 지금 이순간을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비로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

 

 


포털사이트인 다음 메인에 한땀 한땀 심층탐사보도란에 15회 이상 게재가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외지에 완도를 가장 잘 알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댓글 중에는 "사투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군요!너무 정겹습니다.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를 보는 듯 합니다. 어머니, 그 진한 세월을 어떻게 몇 줄의 글로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발로 쓴 취재 기자님의 기사, 감사드립니다"


5년 전이었을까? 본지에서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이 공무원 재직 시 보도된 기사를 보면, 30여년의 공직생활 중 20여년을 홍보분야에서 근무했던 유 원장은 “여건이 불리하거나 몹시 어려울 때도 누가 알아주든, 안알아주든 우리 군을 홍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게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완도의 해녀들과 완도의 마을 숲과 나무를 발간하는데 힘쓰고, 우리지역의 향토사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어 은퇴 후에는 향토사 재정비에 매진할 계획이다. 특히 전공을 살려 지역의 문화 발전을 위해서 봉사할 계획이다”고 전했다.


자신이 말했던 것을 증명했다는 것. 그건 가슴에 깊이 품고 있었다는 말로, 가치롭지 않은가.


현재 완도에서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는 유영인 원장. 
향토사 및 우리지역 민속과 해양문화의 재정립에 앞장서고 있는 유영인 원장은 "올해 처음으로 완도에 거주하고 있는 해녀들의 생애사를 정립하고 있다. 지난 몇 개월간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해녀들을 만나는 지난한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보람된 일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아직 해녀들의 시리즈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도움을 주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 마무리를 잘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처음 계획은 25명의 해녀를 만나는 것이었는데, 지금 29명이 인터뷰를 마쳤다. 어려움도 많지만 조금 더 노력하여 많은 해녀들의 생애사를 재조명 하고자 한다"고.  

  
유 원장은 "지난 2010년 완도군지를 우여곡절 끝에 총괄편집하였는데, 당시에 목포지역 대학교에 용역을 주었다. 용역비가 낮고 우리지역의 자료가 없어 학교가 용역을 포기하다시피 하였다"고. 하지만 지인의 간곡한 부탁과 완도의 향토사가 너무나 소홀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일을 진행했다고. 


맞다. 역사 자체가 반성과 창조 발전, 화합과 평화, 그리고 사랑을 내포하고 있기에 고통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데, 이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란 역사 자체가 가지는 고뇌보다 훨씬 더 숭고한 고뇌를 요구받는다.      


유 원장은 역사학이 전공인 만큼 향토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퇴직 후 제일 먼저 해녀들의 생애사를 재 조명하기로 생각하고 오래 전부터 많은 해녀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이제 그 구슬을 꿰고 있는 중이다고 했다. 
어려웠던 순간에 대해 유 원장은 "우리 지역에서 해녀들이 가장 많은 곳은 청산도다. 청산도 해녀들도 이제는 노령화가 지속되고 있어 기록이 시급하다. 평소 안면을 잘 닦아놨기에 전화를 하고 인터뷰를 가면 해녀를 하는 것에 대해 창피하다고 인터뷰를 거절한다. 또 덕우도나 모도 등 낙도의 경우 배 시간이 맞지 않아 원고 마감시간에 쫒길 때가 많았다"


더불어 "퇴고를 할 여력도 없이 쫒기며 원고를 마감한 적이 여러 번인데 무사히 넘어 간 적이 많았다. 또 해녀들이 약속을 어겨 인터뷰 글을 마무리하지 못해 대체기사를 몇 번 보낸 적도 있었다"고 했다.      


기뻤던 순간에 대해 그는 "해녀들을 만나면서 인터뷰가 잘 이루어지는 순간순간이 기뻤던 순간이다" "소안도에서는 미라리에 거주하는 지방해녀(제주도가 고향이 아닌 우리지역 출신 해녀를 지방해녀라 한다) 3명을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꺼번에 인터뷰를 했는데, 보물을 주머니에 주워 담는 기분이었다"고.


"그때, 그 분들이 더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또 덕우도에서는 약속한 해녀분이 인터뷰를 거절하는 바람에 포기하였으나, 몇 년 전 은퇴한 해녀분이 자신이 해주겠다고 나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고.


고마웠던 사람에 대해 유 원장은 "해녀들과 주변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집사람이다. 새벽배를 타고 섬을 갈때마다 타박을 하면서도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여명의 해녀들에게 인물사진과 기사를 판넬로 제작해 주었는데 모두가 너무나 좋아하였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유영인 원장은 "해녀시리즈를 몇 번 더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을 숲과 당산나무를 글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우리지역에는 각 마을마다 방풍림과 당산나무가 조성되어 있는데 급속한 현대화로 조상 대대로 지켜온 마을 숲과 나무들이 훼손되고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러한 숲과 나무들이 더 이상 사라지기 전에 글과 사진으로 남길 계획이다"고 전했다.


대개 글쟁이들이 글을 쓰겠다면서 어디 조용한 곳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글쓰기에 필요한 여러 조건을 충족하는 스터디 카페나 절중에서 쓴 글은 누군가를 설득할 힘이 없다. 글은 스터디가 아니라 삶이니까. 
글은 언제 어디에서 쓰는가. 조용하고 안락한 곳에서 쓰면 좋겠지만 삶은 늘 조용하거나 안락하지 않다.


종군기자는 포탄 소리가 요란한 전장에서 글을 쓴다. 그래서 글은 무사의 칼과 같다.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도 언제 어디서든 칼을 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현장이 곧 글을 쓰는 공간,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같이할 때 살아 있는 글이 나온다.
삶이 곧 글, 그의 글이 아름답게 빛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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