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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사람 김씨 등이 만들어서 바칩니다″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완도의 숲과 나무

상왕봉 붉가시나무 군락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1.02 15:25
  • 수정 2023.11.0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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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里浦上金等造』
″가리포사람 김씨 등이 만들어서 바칩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가공할 위력을 가진 당시의 최신 화포 대장군전에 음각 된 글씨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전쟁이 끝난 1598년 11월까지 조명연합수군과 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남해안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조명연합군에게 비장의 화기(火器)가 있었으니 그것은 천지를 진동하며 적진으로 쏘아올려진 대장군전(大將軍箭)이었다. 

완도의 진산 상왕봉(象王峰)과 백운봉(白雲峰)을 온통 뒤덮고 있는 사계절 푸른 나무가 있다.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호국(護國)나무 붉가시나무다.
참나무과에 속하는 붉가시나무는 낙엽이 지는 참나무와 다르게 사계절 푸르름을 자랑하는 상록활엽교목으로 참나무보다 강한 성질을 가지고 무거우면서 단단하고, 잘 쪼개지지 않은 탄력이 매우 뛰어난 나무이다.

 

여러 가지 가시나무 중 붉가시라 이름이 붙은 것은 나무를 켜면 단면이 붉은색을 띠어서 이름붙여 졌으며 숯으로 가공하여도 쇗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하고 화력이 우수하다. 

완도읍 대야리에는 아직도 붉가시 숯을 굽던 가마 1기가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으며, 완도수목원에는 붉가시나무를 숯으로 가공한 숯가마가 산속 곳곳에 수 십기 남아 있어 붉가시나무가 한때는 가정의 연료로 요긴하게 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붉가시나무의 열매는 고품질의 전분자원(澱粉資源)으로서 식품으로 가공할 경우 도토리보다 점성과 탄력이 뛰어나 구황식품으로도 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남해안을 비롯해 제주도, 일본, 대만, 중국에 자생하며 호국의 나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의 교토박물관에는 완도에서 자란 붉가시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무기가 하나 보존되어 있다, 위에서 말한 대장군전(大將軍箭)이다.

이 대장군전에는 400여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를 생생하게 떠 올리게 음각으로 아주 뚜렷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리포사람 김 등이 만들어서 바칩니다″.
이 대장군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 7월 안골포해전에서 사용된 것으로 일본장수 구키 요시타카가 전투 도중 자신의 배에 맞은 것을 일본으로 가져가 그 후손들이 최근까지 보관하다 교토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안골포해전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해 이순신장군과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이 연합하여 대승을 거둔 해전으로 구키 요시타카가 이끌던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가 안골포해전에서 모두 격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陸)가 자신의 배에 맞은 대장군전을 수습하여 전리품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안골포해전에서 대장군전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하며 당시에 아타케부네를 요격하여 파손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무기는 대장군전 말고는 없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일본 사가현 진서정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陸) 가문에 전해지는 기록에는 1593년 부산해전에서 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에 지난 2017년 국립진주박물관이 정유재란 7갑자 기념 전시회에 맞추어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陸) 가문의 협조를 받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가져간 대당군전을 진주박물관에서 전시했다.

 

상왕봉의 붉가시나무로 가리포에서 제작된 대장군전은 몸통 길이 182cm, 최대 지름 9.4cm, 무게 10.6kg이다. 머리에 박았던 탄두(철촉)는 사라지고 없다. 
400여년전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대장군전의 제조창이었던 가리포진, 대장군전의 주 재료로 가리포진의 온 산하를 뒤덮었을 붉가시나무가 화마(火魔)로부터 잘 보전되어 후세에 영원히 보전되길 기원해 본다. 

 

완도의 마지막 붉가시나무 숯 장인 정무삼씨

4년전까지 숯을 구운 완도의 마지막 숯 장인 정무삼씨(사진)는 대야리 수원지 건설로 수몰 된 대수골(大水골)에서 1943년에 태어났다.
정씨는 숯하고는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 

 

"군대 재대 후 집에 돌아오니 대수골에 공동 축산단지가 조성 됐어요. 저도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꿈을 갖고 살았는데 소를 방목하다보니 병에 걸리고 외진 곳에서 죽고 하여 마을에서 사업을 접었어요."

 

"지금도 대수골에 가면 풀을 저장했던 싸일로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그 후 정씨는 대수골 생활을 정리하고 대야리 2구에 정착하여 김양식을 하다 주변의 권유로 1960년대 후반 숯막을 짓고 숯을 굽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숯을 굽지 않았어요, 내가 어릴 때 우리 대수골에 숯을 굽는 집이 몇 집 있었는데 자동적으로 숯을 어떻게 굽는지 곁눈질로 보게 돼요, 그래서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숯을 굽게 됐죠"

 

재료는 주로 산림조합에서 간벌 할 때 나온 붉가시나무와 땡가시나무(육박나무, 참식나무?)로 숯을 궜다고 한다.
"붉가시나무는 숯이 기가 맥히게 좋아요. 숯을 만들어 놓으면 얼마나 단단하고 여믄지 숯에서 쨍쨍 쇗소리가 나요. 화력도 좋지만 숯불이 오래가요"
숯의 주요 수요처는 완도 인근이었다고 한다. 

 

"숯은 인근에서 바로 바로 사가는데 워낙에 질이 좋아 만들기가 바쁘게 소비돼요. 집에 가만이 있어도 숯이 팔리는데 이제는 재료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체력이 딸려서 그만 뒀어요." 

 

보람 된 일은 완도수목원의 숯막을 두 번이나 복원해 준 것이라고 한다.

"완도수목원에서 숯막을 복원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쪽도 옛날에는 숯을 많이 궜거든요. 그래서 복원을 해 줬는데 누군가가 지붕으로 올라가서 숯막이 무너져 다시 복원해 줬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마지막으로 숯을 딱 한번만 궈 보고 싶다며, 텃밭의 단감이나 먹고 가라며 주렁주렁 감이 달린 가지를 꺽어주며 인터뷰를 마쳤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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