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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호흡까지 이 땅에 바쳐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와 오늘의 기록과 역사

제6회 고금항일운동기념 추모제 행사를 가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1.1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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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유럽에 이런 말이 전한다. 영국에 전통에는 과거가 있고, 독일의 과학엔 현재가 있으며, 프랑스의 예술에는 미래가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역사에는 모든 게 있다고.
역사!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이 땅에 세운 원초의 과정과 나와 너,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 그리고 나와 너, 우리의 얼을 찾고자하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운명적 필연, 그 운명적 필연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탐구하며 몸과 혼을 갖추어 나아가 비로소 지역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시공간!

역사라 할 수 있겠다. 역사가 밥 먹여 주지 않는다. 다만 그의 가치 속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목표와 가치가 드러나는데,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걸어가야할 발자취, 그 궤적을 다른 말로 하면 숨결이다. 
과거와 오늘의 기록과 역사, 그 맥락과 방향이 시간과 만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진실한 우리의 숙명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
한국 근현대사에서 물러섬 없이 불의에 항의하고, 강인한 사상과 신념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민족운동가 이기홍 선생은 군외면 출생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한 식민통치가 시행되면서 한반도에는 일본군의 군홧발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일장기가 방방곡곡에 나부끼는 비운의 망국사가 시작된 시기 고금면 청룡리로 이사했다. 
어릴 적, 당숙인 고금면의 이현열 선생과 주민들이 주도한 고금 3·1 만세운동을 목격했다.

6·10 만세운동이 벌어진 2년 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4월 광주고보(오늘날 광주일고)에 입학해 독서회 활동을 펼쳤는데, 어릴 적 봐왔던 의식이 1929년 광주고보 2년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했고, 이듬해에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퇴학당했다.
당시 고향에는 당숙인 이현열 선생이 일제로부터 강제 귀국당하여 돌아와 있었던 때였다. 
고향에 온 이현열 선생은 민족독립운동의 기본세력인 농민 중심의 운동에 착수하여 차원 높은 이론과 해박한 학식, 풍부한 대중조직 투쟁의 경험을 현실에 적용하고 효과적인 운동에 필요한 창조적인 지도 방침을 세워 진행했다.
선생도 고향에서 농민운동에 투신했으며 일본인 지주와 경찰과 맞서 투쟁하여 일부 승리를 거둔 항일투쟁의 본보기였던 고금도 용지포 간석지 투쟁에 참가했다. 
1934년에 선생은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한반도 최남단 섬지역 완도를 포함한 5개군(완도, 해남, 장흥, 강진, 영암)에서 관련자만도 3,000여명에 이르고 558명이 연행되거나 구금되고 57명이 기수돼 재판에서 공산주의 운동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934년 2월 27일부터 몰아닥친 그야말로 일제의 광풍의 탄압사건. 

완도지역만 해도 전남운동협의회의 회비는 남자 20전, 여자 5전을 받았는데 자발적으로 회비를 납부하는 사람이 약 5,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완도에서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그야말로 문제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전남운동협의회 활동을 선생은 김홍배, 오문현, 황동윤 등과 함께 주도했다가 체포돼 복역하게 됐다.
억울한 구금생활을 끝내고 풀려나 집에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1939년 1월 7일부터 선생은 거주 제한 조치를 당했다. 사상범 보호관찰소로부터 속히 광주로 오라는 서신을 받은 것이다. 선생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엄혹한 시기에는 무조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명령이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시위원을 지냈으며 1949년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동생, 매제가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6.25 발발 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체포돼 처형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인민군 진주 후에는 인민 정권에 의해 반당분자로 몰려 체포돼 2개월여 구금됐다. 종전 후 1954년에는 구국동맹 사건으로 3년여의 옥고를 치렀고, 1960년에는 광주 4·19 시위로 체포 구금됐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사회대중당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독재정권 하에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매 정권마다 15회 이상 검거, 12년 6개월 투옥생활을 거쳤고, 자녀들은 지긋지긋한 연좌제에 시달렸다. 생애 말년 실명 상태에서 구술로 자신의 삶과 사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996년 12월 7일 사망,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고금항일운동기념사업회(회장 우중석)는 지난 11월 10일 고금항일운동 추모공원에서 제6회 고금항일운동기념 추모제 행사를 가졌다.
우중석 회장은 "고금도는 10명의 항일민족운동의 선구자와 53명의 독립유공자가 있는 독립운동의 성지로 알려져 있으며, 고금면 애국선열들의 나라를 위한 투쟁정신을 숭고하게 기억하고 그 얼을 후손들이 이어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신의준 도의원은 ."꺾일 수 없는 불멸의 정신은 시대에 존재하는 이들의 정신적 가치 공유로써 자리매김하며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마음의 공명은 시공을 초월해 선대에서 후대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져 왔으며 미래의 세대에게도 이어져 갈 것이다"고 밝혔다
김양훈 의원은 "오늘날 글로벌한 세계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그 조화 속에 인류공영의 큰 뜻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해 우리 선현들이 보여줬던 고유한 정신, 즉 불멸의 정신은 오늘날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융화하면서 전 인류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photograph by 최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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