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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지대 양반가 소울 푸드는 예작도 어민의 '이네기' (3)

완도의 장수도, 제주의 사수도 '영토분쟁' (3)

예작도 어민들이 잡은 상어 곡식과 바꿔
곡창지대 해창만에 그 흔적이 아직 남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1.23 15:46
  • 수정 2024.04.1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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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배미와 탱자배미가 있다. 여기에서 ‘배미’는 작은 논의 단위를 뜻한다. 보통은 ‘우묵한 논이라서 우묵배미, 쑥 들어간 마을이라서 쑥배미’라고 부른다. 그런데 난데없는 상어배미라니, 그것을 독특한 이름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해남군 송지면지를 보면 금강마을과 월강마을 지명유래지에 상어배미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거기에는 '뱃사람들이 상어를 잡아 곡식과 바꿔간 곳'이라는 내용을 짤막하게 적어 놓았다. 유사한 것이 여러 곳 있다. 대부분 곡창지대로 여겼던 바닷가 인근 마을에 붙은 지명들이다.

해남 제 1항구였던 어성천을 따라 올라가보면 해창만을 시작으로 최대 곡창지대인 삼산면 사러리 들판이 있다. 그곳에도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전한다. 사러리 들판은 바람결에 곡식이 부딪혀 ‘사르륵사르륵’ 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추수 때의 풍성함을 빗댄 표현이다. 

그곳에는 만석지기 양반이 살았고, 그 흔적은 아직도 뚜렷하다. 대표적인 곳이 인근의 현산면 백포리 공재 윤두서와 초호리 윤철하 가옥이다. 고택은 조선시대 사대부가 사용한 그대로 보존된 문화재이다. 삼산벌 사러리 들판의 만석지기 이참판 댁은 70년대 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송지면 월강마을 상어배미에서 구산천을 따라가면 수백 미터 둑방에 노거수 군락이 보인다. 그곳은 오래전 포구였고, 노거수는 짝지에서 어선을 정박할 때 뱃줄 묶는 용도로 심어진 나무들이다. 2~300년 세월을 견디며 수십 그루 노거수가 여전히 생기를 품고 서있다.

옛 영화가 가득한 때, 해남에는 문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그들은 소요유하며 시문을 주로 남겼고, 그 내용 중에 어성귀범(漁城歸帆)이라는 문구가 있다. 지역의 8경을 노래한 것으로 어성포에 돛배가 모여 드는 해질녘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그때 만선의 깃발을 올리며 포구를 찾아오던 뱃사람은 누구였으며, 무슨 고기를 잡았던 것일까? 조사해 보니 사수도 해역에서 어장을 한 보길면 예작도 어민이 대다수였고, 그들이 잡아 온 것은 '징어리멸치'와  '이네기'라고 부르는 칠성상어였다. 

사수도에서 추자도 인근 수역은 그때도 지금처럼 황금어장이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친 해남은 어족이 풍부한 편이지만, 먼 바다에서 잡은 큰 물고기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사수도 인근에서 잡은 이네기로 포를 만들어 젯상에 올렸고, 젓갈을 담을 수 있는 징어리멸치는 양반집 아녀자들이 귀하게 여길만한 품목이었다. 

섬 사람들이 잡아온 상어와 곡식을 맞바꾸면서 거래 관계를 서로 유지하려고 양반가에서 지정한 논이 바로 상어배미다. 사수도의 상어잡이가 매년 곡식을 바꿔 간 논이라서 상어배미, 탱자를 던져도 아래로 빠지지 않고 위에 얹혀있을 만큼 곡식이 영글었다는 탱자배미를 중요하게 여겨서인지 그 기록이 아직 남아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난 2001년 3월 한 공영방송에서는 사수도 해역에서 대대로 상어잡이를 이어온 마지막 상어낚시꾼을 방영했다. 완도 보길면 예작도 어민을 다큐멘터리로 취재한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양재 씨와 예작도 주민들의 이야기다. 상어 철이 되면 바다에 나가려고 부인 전상례 씨와 주낙을 준비하는 과정이 카메라에 그대로 포착됐다. 예작도 주민들도 채비를 서두르고, 예작도 이장 김창근 씨 부부도 화면에 나온다.

그는 3톤이 넘는 배를 끌고 다녔는데, 한번은 엄청 큰 이네기가 걸려서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는 이야기가 생생하다. 여럿이 다니면 상어잡이가 훨씬 수월할 터인데, 대다수가 뭍으로 나가고 마을에는 몇 가구 없던 때다. 보통 100킬로그램이 넘는 상어를 잡으려고 부인과 단둘이서 다니기엔 버거울 정도였다고. 

이네기는 갈퀴로 걸어서 배 위로 올리는데, 얼마나 힘이 센지 그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민들이 준비한 도구가 몇 가지 있다. 몽둥이는 필수다. 상어가 배로 가까이 올 때 머리를 때려서 기절 시켜야 했고, 서너 시간 실랑이를 쳐야만 가까스로 상어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빨이 강한 상어가 줄을 끊어 버릴 수 있으니 중간에 철사 줄로 주낙을 단단히 고정한다. 미끼는 보통 전어를 쓰는데, 상어 잡을 때는 비싼 숭어를 토막 내서 사용했다. 피 냄새로 유인해서 상어를 잡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져간 풍습이지만, 90년대 까지만 해도 섬 주민의 잔칫상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상어고기였다. 사수도 해역에서 잡은 이네기는 예작도 주민들을 넉넉하게 했을뿐 아니라, 곡창지대 양반가에서 선호하는 그들만의 소울 푸드가 된 셈이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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