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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옛 지도에 사수도가 있다 (5)

완도 장수도, 제주 사수도 '영토 분쟁' (5)

가리포진 고금진 청산진 강진현 소속으로
사수도는 청산도 본진에 속했고, 제주도민
출륙금지령으로 육지 가까이 지낼 수 없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2.07 16:05
  • 수정 2024.04.1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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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제주도 소속이 된 추자도에서 23.3km, 전남 완도군 당사도에서는 18.5km 떨어진 21만4000㎡ 규모의 무인도인 장수도(사수도)를 둘러싼 두 지자체간 분쟁은 1979년 완도군이 이 섬을 ‘장수도(障水島)’라며 ‘완도군 소안면 당사리 산 26번지’로 지적을 부여해 등록을 추진하면서 분쟁이 시작됐다. 그동안 양 지역 어민들과 지자체간 갈등이 지속돼 왔고, 2005년 11월 제주도가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면서 법정 분쟁으로 비화됐다.
권한쟁의 청구를 접수한 헌재는 3년 여의 고심 끝에 2008년 12월 26일 “사수도의 관할권한은 제주도에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최근 다시 이곳 해역을 두고 공유수면과 관련한 분쟁이 시작됐는데, 본보에서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적 근거와 그곳에서 생업을 했던 주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사수도는 언제부터 우리나라 지도에 등장했을까?

1861년에 만든 조선의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는 여서도 아래 사서도가 있다. 조선후기 가장 믿을 수 있는 우리나라 지도의 완성본 대동여지도는 1834년에 제작한 청구도를 증보한 것으로 이전의 지도에도 사서도는 지도상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울대 규장각에서 정리해 펴낸 조선시대 후기 지도를 보면 청산진 지도에는 사수도가 분명하게 그려졌다. 거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사수도는 청산진의 본진에 속한다. 

수로는 80리 수심은 40장으로 기록한다. 다만, 한자 표기는 지금과는 차이가 있다. 대동여지도에 사서도(斜鼠島, 竹변인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위에 획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로 그려진 섬은 청산진 지도에서는 사수도(蛇水島)로 표기하고 있다. 

제주시는 장수도와 사수도 분쟁에서 역사적 기록에 의해 남사록 등의 문헌에 나온 사서도의 기록을 제시했다. 그 기록에는 모두 “추자도와 사서도 인근 해역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심히 염려스럽다”는 내용을 인용한 것. 그러나 추자도는 근대 이전에 전라도의 영역이었고, 사서도와 추자도 해역의 왜구출몰은 제주 지역의 지리지와 관계없는 외세침략의 대비책을 기록한 내용들이다.

거기에 더해, 제주도는 한때 출륙금지령이 내려졌다. 공납의 폐해가 심각해서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1608년 대동법을 만들었으나, 제주도는 대동법 시행 예외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제주도는 지역의 특성상 쌀이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대동미를 낼 수가 없었으며, 제주도 특산물이 다른 지역에선 제대로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라서 제주도민들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공납에 허리가 휘어야 했다. 화폐경제의 형성과 발전이 느리고 쌀과 포목이 주된 교환수단으로 활용되던 조선시대의 특성상 어설프게 대동법을 적용할 경우 제주도에도 부족한 쌀을 육지에서 사다가 올려 보내면 다시 중앙에서 그 쌀로 제주도의 특산품을 구입하는 비효율적인 과정에서 납세자들의 부담이 크게 증가할 위험까지 있었던 것.

공납을 위한 물건을 만들고 관리하고 바치는데도 허리가 휘는데 험한 제주도의 환경 때문에 생활도 힘들었던지라, 제주도는 말 그대로 고난의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뭄이 자주 들어 그 때마다 인구가 줄고 유민이 발생했는데 공물은 줄지 않아서 다시 유민이 증가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로인해 조선 중기 이후 제주도 사람들이 육지로 달아나 유민이 되는 사례가 증가하자 인조 7년, 1629년부터 순조 25년, 1825년까지 조정에서는 약 200여 년 동안 제주도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제주 사람들은 ‘테우’와 같은 뗏목을 연안 어업에 사용해야 했다. 먼 바다로 어업을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거상 김만덕은 흉년에 무려 500섬의 쌀을 긍휼미로 내놓아 정조의 어명으로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수도 인근 해역을 이용할 수도 없었거니와 섬을 벗어나는 일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육지로 나오는 사람들은 관탈도를 지나 추자도를 거쳐 오는 게 유일한 통로였다.

그런데, 제주시는 무슨 근거로 예전부터 사수도가 자기들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계속)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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