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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에도 철비(鐵碑)가 있었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12.14 15:53
  • 수정 2023.12.24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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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립도서관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책로를 걸었다. 예전에도 몇 번은 다녀갔지만 이곳은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고향을 찾은 느낌이랄까. 옛것이나 빈티지 타입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보는 내내 쌓였던 긴장감이 해소되기 때문일 것이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빗돌에 깃든 사연을 알아가는 것도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30년 전 여행지로 즐겨 찾았던 느낌, 골목길이 보이고, 시간은 여전히 그때 그 장소에 머물러 있다. 산책길을 걷다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마을전경과, 주도 앞 바다와, 가까이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는 이곳이 주는 매력이다.

충혼탑 올라가는 계단에는 석비(石碑)와 철비(鐵碑)가 나란히 서있다. 빗돌에 새겨진 내용을 읽다가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를 거슬러 상상속을 유영한다. 이곳의 철비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훼손된 철비를 대신해 나란히 석비를 세워 그 내용을 자세히 비문에 기록했다. 

철비는 227대 가리포첨사 명선욱(明瑄煜)의 영세불망비다. 정확한 명칭은 조선시대 각 진영에 속한 종3품 무관 벼슬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낸 가리포첨사의 ‘행절제사명공선욱영세불망비’로 1894년 10월에 세워졌다.

명공이 가리포진에 발령 받아 온 것은 고종 30년인 1893년 1월 29일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가리포진이 폐진 되는데, 마지막 첨사가 온 것이 1894년 7월5일이니 1년 반 남짓 근무한 것으로 ‘가리포첨사 선생안’에 기록됐다.

철비는 전국에 드물게 분포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마을 사람들이 쇠붙이를 모아서 세운 것도 있다. 석물 안에 세우기도 했고, 전각을 만들어 세운 철비도 있다. 그러나 철비만 달랑 세워진 게 대부분이다. 철비는 문양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머리에 관을 둘렀고, 거기에는 나뭇잎, 나뭇가지, 동그라미 등 여러 문양을 그려 넣어 각자의 특색 있는 모양새를 갖췄다.

2007년 포스코 역사관에서는 ‘잊혀진 문화제 철비’ 라는 제목으로 전국에 있는 철비를 조사하고 탁본하여 전시회도 열렸다. 쇠는 돌보다 강해서 영원하다는 믿음 때문에 공덕비를 철비로 많이 세웠다고 한다. 

선정비는 보통 돌에 새긴 석비가 주를 이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쇠로 만든 철비를 많이 세웠다. 철비는 지방관의 업적과 그를 영원토록 기리고자 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스며있는 철조유물이다.

그러나 철비들은 갖은 수난을 겪기도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수난을 겪은 철비가 많다. 대동아전쟁 막바지에 다다르자 일본은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만들 목적으로 물자 공급 때문에 우리나라 민가의 쇠붙이는 모조리 강탈했다.

그때 전국에 있는 많은 철비가 회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일본은 전쟁 물자에 필요한 자원을 모으려고 각 마을별로 울력과 더불어 자원 할당량을 채우게 했다. 쇠붙이뿐만 아니라 곡식과 면화, 연료가 될 소나무의 송진까지도 할당량을 채우도록 했으니, 거기에 희생된 문화재급 소나무가 전국에 상당량이 된다.

완도군의 철비도 일본의 수탈을 피할 수 없었다. 1942년 일본은 완도 군외면 선착장에 명공의 철비를 철거해서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제작하려고 야적해 놓았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지역 항일운동가인 소남 김영현 선생이 군외면 갈문리 사람과 함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황진리에 사는 그의 조카 김내호 집에 옮겨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현재의 위치에 놓인 것은 해방 후 일이다.

전국의 철비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8기 정도, 한국철비대관이라는 보고서에는 전국에서 조사된 철비를 지역분포도와 시대별로 구분하여 기록하기도 했다.

철비마다 각각의 사연을 품고 있다. 그 중 특이한 것이 있다. 숙종 10년인 1684년에 서당을 운영하려고 창립한 학계의 운영에 관한 것인데, 1714년에 건립한 진도군의 학계비다. 울진군 북면 두천리 '내성행상불망비'도 있다. 내성과 울진장을 넘나들던 보부상을 위한 것이다. 상인들의 상행위를 도와준 것에 대한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 한글로 제작한 철비도 있다.

백성들은 자기 지역에서 본이된 지방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빗돌을 세웠다. 하지만 선정비는 마음대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정비를 세우기 위해서는 조정의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방관 중에는 부임한 곳의 유력세력과 결탁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해 그들이 연관된 고향이나 지역에 부임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들이 도입되기도 했다. 일부 지방관들은 자신이 직접 돈을 들여 선정비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무수한 세월이 흘렀어도 그 방식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완도읍에는 비석거리가 있다. 주로 전쟁을 많이 치뤘던 지역에서 비석거리를 볼 수 있는데, 지명으로 보면 완도군에도 빗돌이 꽤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빗돌들이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며, 대부분 훼손됐을 터. 그것은 지역의 역사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슬픈 일이다. 

작은 철비 하나라도 지켜내려 했던 선각자의 사연이 그래서 후손들에게는 큰 울림을 준다. 그것을 몸소 지켜내려 한 것은 우리의 정신을 찾는 일이었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완도군이 처해있는 지금의 영토분쟁도 마찬가지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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