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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을 꿈꾸던 사수도 선사인류••• 섬 지역 제한적 규제, 완도군엔 큰 손실 (15)

완도의 장수도, 제주의 사수도 영토분쟁 (15)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4.02.29 09:45
  • 수정 2024.04.1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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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인류가 천문을 기록했다고? 그것이 사실일까? 믿거나 말거나가 아닌, 이것은 진짜이야기다. 어디 그뿐이랴. 그들은 돌에 지도까지 새기며 자신들이 사는 지역 내에 사냥감이 많은 곳, 파도가 높은 곳, 늪지대 등 위험요소를 표시해 사용했다.


고대인은 천문을 관측하고 하늘의 이치를 알아야 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다뤘다. 그것은 하늘과 통하는 제사장적 권한이었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만 여겼던 성혈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돌에 표현한 것으로 학계는 연구 결과를 속속 발표했다. 


우리나라 고대유적에 표시한 별자리는 중국에서 발견된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구멍의 크기가 각각인 것은 별이 빛나는 밝기에 따라서 표현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천문관측은 고대사회를 지배했다. 그들은 농사체계를 이뤄 역법을 관장하고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고대인의 무덤인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는 통치자의 권위를 말한다. 고금도 고인돌공원에 있는 무덤석에도 별자리 흔적이 뚜렷하다. 이것은 선사시대부터 완도 바다에는 통치체계를 갖춘 막강한 해양세력이 살았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내륙에서 무리를 이룬 고대인은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먹을 식량과 동식물의 수효가 부족했을 것이다. 그들은 더 넓은 바다의 큰 물고기 사냥이 불가피했다. 바다에서 80프로의 식량자원을 얻었던 고대인들에게 그래서 사수도 해역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도 같았다.


지난 1996년 기준으로, 국내에서 발견한 고대인이 사용한 낚싯바늘은 단식과 결합식을 포함해 모두 216여 점이 등록되어 있었다. 1980년대 초 강원도 양양 오산리에서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90년대부터 2000년도까지 발굴한 것이 고성 죽왕면 문암리, 양양, 강릉, 울산, 부산, 여수까지 이르러 같은 형태의 낚싯바늘이 발견되어 기원전 8,000년 전부터 2,000~3,000년 전까지 이런 형태의 낚싯바늘을 사용했다고 학계는 보고했다.


그러나 여서도 패총에서는 그것들을 능가한 다량의 유적이 발굴됐다. 선사시대 패총유적과 함께 여서도에서는 15개의 성혈 바위도 발견했다. 그동안 농경사회를 주관하는 다산과 신앙의 형태로만 받아들였던 성혈 바위.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만 이뤄졌을뿐 완도의 해양고대사 연구가 깊이 있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주는 의미가 심상치 않다.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의 대표적인 예는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에도 뚜렷한 흔적이 남아있다. 벽화에는 상상의 하늘을 묘사했다. 거기에는 신선과 선녀가 노닐고, 은하수나 견우직녀와 같은 설화 속 별자리가 함께 그려져 있다.


별자리는 천정 위로 좁아진 여러 면에 주로 그려졌다. 동쪽에는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세 발 달린 까마귀)와 서쪽에 그려진 달 속에는 옥토끼와 두꺼비가 뚜렷하게 새겨졌다.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28개의 별자리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며 고구려인은 하늘의 자손임을 뜻한다고. 근래에는 가야문명 발굴 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뤄졌고, 함양 말이산 13호 고분의 무덤 덮개돌에서 특이한 석판이 발견됐다. 덮개돌 표면에 새겨진 무수한 홈, 그것은 바로 별자리였다. 


남반구에 주로 나타나는 별자리로서 북두칠성을 닮은 남두육성과 방수, 심수, 미수, 기수 등이 표현됐다. 북두칠성이 죽은 자를 위한 별자리라면 남두육성은 산자를 위한 별자리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것은 서양의 별자리 이름과 달라서 낯설게 들리는 우리 전통의 별자리 이름이라고. 


선사시대 인류에게 섬은 천혜의 자원이었다. 난폭한 맹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고, 마음껏 바다생물을 채취하고 포획하여 평화롭게 정착할 수 있는 공간을 바다는 그들에게 내주었다. 그곳에서 고대인들은 부족사회를 형성했고, 왕성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섬은 버려진 땅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왜구의 노략질로 인해 고려 때부터 공도정책을 펼쳤고, 텅 빈 섬에 숨어 들어간 사람들의 무리로 인해 오래전부터 섬은 척박하고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완도의 여러 섬에서 선사시대의 유적들이 발굴되어 태초부터 섬 지역에도 고대문명이 형성되어 왔음을 밝히는 계기가 됐다. 섬 지역의 고고학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함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완도의 섬 곳곳에서 대양을 꿈꾸며 세력을 확장했던 고대인,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1960년대 여서도 인구는 1천명을 육박했다. 그들이 먹고 살만큼의 식량자원과 식수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이다. 선사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것은 사수도 해역의 풍부한 어족자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


지난 2005년 여서도 패총에서 선사시대 유물이 다량 발굴됐다. 그러나 최초의 타이틀이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섬 지역의 제한적 규제 속에서 다소 늦게 이뤄진 유적 발굴이 완도군에 큰 손실을 가져다준 것은 아닌지. 이것은 지역사회가 지역의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며, 그 관심의 척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 무척 아쉽기만 하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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