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현 과장 부부는 참 멋져 보였다.한희석 과장 또한 알콩달콩 연애 이야기도 참 많이 부러웠는데...21일이 부부의 날. 완도신문의 원고 청탁을 받고서 고민이 깊어진다. 일단은 부끄럽다. 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하면 좋을지 그게 참 어려운 것 같다.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쓴다고 했을까?언제였을까? 그녀가 나에게 들어온 것이.내 심장에 어떻게 그녀가 들어왔을까?내가 내 자신을 봐도 샌님 같아서 어디 연애를 해볼 수 있었을까만. 돌이켜보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첫 번째 발령받은 곳, 고향 완도군 고
아직 결혼 전이예요. 완도신문에서 이번에 청년 특집을 꾸린다고 신혼부부나 예비 부부에 대한 결혼이야기를 싣게 된다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제가 추천되었다고 합니다.쑥스럽지만 제 이야기를 해 볼께요.태어난 곳은 순천이고(태어나기만 했어요) 어렸을 때는 장흥에 살다가 고등학교때 광주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현재 나이는 29살, 이름은 조혜연입니다. 부끄럽지만 헤어디자이너로서 이름은 레나에요. 완도읍에서 '헤어다방'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미용업에 종사하게 된 건, 대학교에 다니면서 방학이나 학기 중
어디, 이런 글을 쓰리라곤 상상조차 했을까! 어느 날, 사석에서 우연하게 만난 완도신문 편집국장. 청산이 고향이라니, 대뜸 "11월 특집호가 청산면이라 청산 출신의 결혼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옆에 있던 동료들까지 거든다.사면초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참, 거부할 수 없는 원고 청탁. 그 순간 머리 속에는 '내가 어떻게 아내를 만나게 됐지, 지난 세월 우리의 삶은 잘 살아왔나!' 이러저러한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머나먼 한 점의 섬, 청산도.제주도에서 닭소리가 들려온다는 절해고도의 외딴 섬.예
몹시도 가난했던 화가 클림트.그가 사랑했던 여인, 플뢰게!돈 많은 상류사회의 남자들은 화사한 꽃과 화려한 마차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가난한 청년 화가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해 줄게 없어 직접 꽃을 그리고 오려 사랑하는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가난한 화가 클림트가 떠올랐다.어느 날 본보 편집국에 도착한 한 장의 편지를 보자."시간이 물러다 준 선물이란 당신과 나와의 만남을 즐겁게 해주는 태양과 달입니다. 체포되던 날 당신의 당황한 얼굴과 태연하면서도 불안한 나의 심장이 뛰던 날이 엊그제 같것만 뼈아픈 세월이 흘러 두 달이 담을
“군 홍보계장 출신인 면장님에게, 독자 투고 하나 부탁해도!”“무, 무슨 내용으로?..."“사모님과의 연애담 등등...”속으로 화들짝 놀라면서도 겉으론 정중하게 말했다.“우리 부부에게는 이렇다할 연애담이 없어 쓸거리가 없는데...”“그럼 다음주, 나의 반쪽란은 백지로 나가게 됩니다. 물론 독자들에겐 면장님이 고사했다고 알려야 겠지요!”완도신문 편집국장의 집요하고도 막무가내식 협박성(?) 원고 청탁! 아, 정말이지! 빠져 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린 듯하다.먼저 소중하고 귀한 지면을 차지하게 되어 독자분들에게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할
따르릉~“생일면사무소 안환옥입니다.” “안녕하세요! 보길면사무소 김 00인데요. 취로사업에 대해서 여쭤볼게 있어서요.”아주 옛띤 목소리.신규 발령을 받은 여직원으로 보길면사무소 직원 분이 생일면에 근무하는 나한테 물어보라고 해서 전화했다고 말했다.(생일면에 근무하기 전에 보길면에서 근무했었다.)난, 직장동료로서 업무를 성실히 알려주고, 업무상 몇 번의 통화를 했었다.그리고 합동집무(예전에는 군청에서 12개읍면 직원들을 상군승인해서 일정 장소에 모여 군 집계를 냈음)가 있어서 그곳에서 전화통화만 했던 보길면 여직원을 처음 만났다.처음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왔을까?그건 마치 우주가 생겨날 때 처럼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은 물방울 하나가 터질 때 상상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빠르게 팽창되어 생겨난 우주처럼그렇게 사랑은 왔다.하지만 누가 사랑이 왔을 때를 온전하게 기억하는가? 그 시간이란 너무 짧으면서도, 황홀하게 길어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 팽창된 우주 한가운데 지구라는 행성에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놀라운 일.오늘 만나고, 내일 생각하고, 그 다음날 전화하고, 그 다음날 연락 이 없고,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운명처럼 사랑하
완도군청 각 위원회의 민간위원들, 퇴직공무원들로 포진최근 본지 1108호 1면에 ‘퇴직공무원출신 아니면 민간위원 자격 없나’라는 기사 보도가 있었다. 완도군청 일부 위원회와 자문위원단에서 민간 위원에 군청 퇴직 공무원 출신들이거나 위촉할 계획이라는 지적이다.완도군 산하 위원회는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공직자 윤리위원회와 군정조정위원회를 포함해 61개나 되고, 752명이 각종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위원회의 역할과 참여 대상은 잘 알지 못한다. 군에서 위원회의 민간위원에 퇴직한 선배 공무원들을 임의대로 위촉하거나 영향력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허름한 차림의노부부가 어느날 하버드 대학 정문을 들어서며 이 대학의 총장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물었답니다.그런데 그 수위아저씨는 이렇게 답하는것이었습니다."우리 대학의 총장님은 바쁘셔서 당신들을 만나줄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노부부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이죠. 즉시 노부부는 발길을 돌렸을 뿐 아니라, 하버드대학에 거액을 기부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대학을 스스로 세우기로 맘 먹었답니다.그렇게 탄생한 대학이 스탠포드라는 명문대학입니다.실제 노부부는 자식이 없는 억만장자로 가진 재산을 의미 있게
한 2년 지나면 노인이 되는 60대 초반, 배움도 부족하고 어디 나서기도 싫어하며 자기 표현도 서툰 그래서 항상 뒷전을 찾는 소박한 여자입니다. 그랬기에 완도신문 편집국의 원고청탁을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간곡하고 간곡한... 결국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본다는 마음으로 생각 나는데로 적어 보겠습니다.저는 노화읍(그때는 노화면)의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지는 40년이 되었습니다. 1976년 노화면사무소로 첫 발령을 받은 남편. 노화면에 사는 남편의 고
(2월호에 이어)딸 셋 중 둘째인 나는 언니, 동생과 달리 요리에는 젬병이다. 인터넷을 뒤져서 어찌 흉내는 낼지언정 음식 만드는 것이 도통 즐겁지가 않다. 누군가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즐거움만 알 뿐. 그래도 신혼시절에는 집 밥을 지어 먹으려고 노력 했고, 종종 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제법 근사한 밥상을 차려내기도 했다.하지만 요리에 대한 흥은 이내 사그라들었고 머지않아 나의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있는 반찬에 간소하게 먹자’며 반찬의 가짓수를 점점 줄여 나갔다. 요즘은 간소한 삶이 대세라지만, 시대를 너무나도 앞서나간
20년 전 이맘 때 나는 완도를 떠났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 때 내 나이는 열아홉.거처를 옮기는 것 치고는 짐이 가벼웠다. 엄마는 배웅하는 내내 광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멀미 때문에 고생할 딸을 걱정하셨다. 완도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자동차보다는 배를 탈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일까.배 멀미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차를 탈 때는 항상 멀미약은 기본이고 사탕과 생수, 검은 비닐봉지가 호위무사처럼 나를 따랐다. 그 당시에는 버스로 광주까지 2시간 40분이 걸렸으니 멀미를 할만도 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나를 향해 차창
그저, 좋은 시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정든 고향, 부모님, 잘나가는 직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내 운명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2003년 3월 5일. 지금도 잊지 못해 나의 아이디로 남아있는 날. 자유 대한민국에 첫발을 디딘 날.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난, 흔히 말하는 조선족이다. 부모님의 고향이 함경북도이다 보니 나서부터 조선말 아니 한국말을 배웠고, 사범대를 조선어교육학과를 나와 한국말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직장생활을 하던 중 한국행을
3대째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나. 중·고등학교 당시엔 가정적으로 어려움도 있었다.하지만 늘 기도하셨던 어머니와 미션스쿨(염광 여자 중,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교회 목사님의 가르침과 영향으로 나의 학창시절은 큰 어려움없이 이겨내고 헤쳐 나올 수 있었다.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여자로서는 흔치 않는 꿈이었지만, 목회를 한다는 건 나의 사명이었기에 대학 또한 주저없이 한신대 기독교교육과를 선택했다. 지금의 남편(전민 목사)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같은 상담학회를 통해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남편은 목회상담학회 회장이었고
10월의 아주 멋진 날에 저 붉게 물든 단풍처럼 설레고 쑥스러웠던 연애 시절.그때 나이 22살. 난, 부산의 대우 회사에 근무하는 지인의 소개로 부산 생활을 하게 되었다.당시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에는 경기가 안좋아 곧 있으면 회사가 부도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소식을 접한 시골 어른들도 객지에서 고생하는 막내딸이 안쓰러웠는지 그러면 시골로 내려오라고 했다.잠시나마 타향살이를 하고 있던 난, 그렇게 해 다시 내 고향 완도로 내려오게 되었다.시골에 내려와 가끔식 여고동창 친구가 근무하던 사무실에 커피를 마시러 놀러가곤 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