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1월 27일 거제도 360만 평의 땅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명, 여성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17만 3천 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수용소 안에는 공산포로와 반공포로가 함께 수용됐다. 포로 수용소장 F.T.도드 준장은 포로들의 본국 귀환을 포기시키려고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다. 이에 포로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수많은 포로들이 살해됐다. 그 과정에서 수용소장이 감금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그 후 일부 포로들이 인근의 추봉도, 용초도 등으로 분산 수용됐고 포로 수용소장은
근래에 비록 이런 일은 하지 않으나 만약 종요와 왕희지의 훌륭한 서첩을 구한다면 때때로 다시 임서하여 모방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근세 사람들은 거칠고 간략한 것을 좋아하고 자세하고 치밀한 것을 싫어하여 드디어 체본을 임서할 때 단지 그 필의만 터득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글자 모양을 같게 쓰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간혹 자기가 일삼는 것이 지나치게 구속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스스로 별도의 곁길로 달려가서 옛 사람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도 하니 다시 어찌 그 필의(筆意)를 체득하겠는가?또한 이들이 옛
"사실이 너무 잔혹하지 않고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 나라에서 살았으면"(버나드 쇼, '존 불의 또 하나의 섬')통영 항 여객선 터미널 부근 식당, 나그네는 밥상이 나오기를 기다린다.주인은 점심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메뉴는 '생선 정식' 하나뿐이지만 식당은 늘 만원이다.밤이면 식당은 밥집의 간판을 접고 '다찌' 집으로 변신한다.다찌 집이 돼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메뉴는 따로 없다.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유일한 메뉴.술은 맥주나 소주 불문하고 무조건 한 병에 만
그 뒤 내가 윤순을 찾아가니 윤순은 책상위에서 미불의 글씨를 뽑아 보이며 말하기를 “옛 사람들은 반드시 결구를 고상하고 빼어나게 하고자하여 세속 사람들의 안목에 합치되지 않았으니 이 노인의 글씨 또한 한글자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대개 서도는 세속 세속 사람들의 이 뜻을 알고 재주 또한 이렇게 하기에 족하나 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고루하여 필법을 알지 못하니 반드시 글씨의 모양이 지극히 고와야 비로소 좋아하기 때문에 세속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어 예쁘고 고운 글씨를 쓴다.내가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성취한바가 마땅히 여기
다음날 아침, 가장 연장자인 잠수가 꿈 이야기를 했다. "어젯밤 꿈에 애기업개를 두고 가지 않으면 모두 물에 빠져 죽는다."고 했다. 테우의 주인 이씨 부인 또한 같은 꿈을 꾸었다. 잠수들은 애기업개를 놓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씨 부인은 기저귀 하나를 걸어놓았다. 테우에 사람들이 오르자 다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씨 부인은 애기업개에게 기저귀를 걷어오도록 시켰다.애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 테우는 떠나갔다. 애기업개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테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3년 동안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마라도에 가지 못
강기(姜夔)가 말하기를 “글씨는 공교로운 것보다는 졸박한 것이 낫다” 라고 하였고 황정견은 말하기를 “무릇 글씨는 졸박함이 공교함보다 많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요즈음 글씨쓰는 젊은이들은 신부(新婦)가 단장하고 온갖 것으로 꾸며도 끝내 열부(烈婦)의 자태가 없는 것과 같다.지금 이 폐단을 중단시키려고 하면 오직 주(周)나라의 주문과 한나라의 예서사이의 글씨에 정심(精心)하며 힘써 공부하여서 깊고 두터우며 예스러운 뜻이 글자의 표면에 넘쳐 나도록 하고 세속의 논의에 흔들려 신채(伸彩)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을 훌륭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민주당 천정배 의원이 지난 19일부터 20일까지 양일간 완도방문을 두고 전남도지사 신당 후보 출마설이 나돌자 본지와 인터뷰를 통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지난 19일, 천 의원은 “내년 지방선거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호남 분들이 늘 지지해 주셨던 민주당이 현재 어려운 처지에 있고, 실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내년 지방선거는 실의에 빠져 있는 호남 분들이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개혁정치의 전망을 보여 주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천 의원이 현재 호남인들의 민주당 비판의 수위를 읽고 있다. 전례 없
어제 제주 섬으로 왔다. 꽃들은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만 섬은 바람 잘 날 없다. 사람살이는 암만해도 꽃보다는 섬 쪽에 가깝다. 동풍이 그치는가 싶으면 서풍이 불어온다. 또 언제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불 것인가. 꽃 피어보지도 못하고 꽃 시절이 벌써 저만큼 간다. 모슬포에서도 정기선이 뜨지만 배시간이 맞지 않아 송악산 유람선 부두로 왔다. 부두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마라도행 배를 기다리며 줄지어 섰다. 이 근방, 모슬포 지역은 제주에서도 바람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모슬포를 '못살포'라 했었
우리나라에서 해서는 시지(試紙)의 글자 크기 만한 것을 주로 쓰고 단지 결구가 아름다운 것만을 취하며 끝내 오로지 고법을 쓴것만 보고 큰 글씨는 쓰는 법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변석(辨釋) 하기가 어렵지 않다.큰 글씨와 작은 글씨 쓰는 법은 본디 차이가 없으나 글씨가 크면 점차 가지런하지 않고 기고(奇古)하게 된다. 그러므로 안진경의 결구는 시속에 얽매였다고 하나 오계갈(晤溪碣)과 동방삭화상찬(東方朔畵像贊)의 류는 글자가 작기 때문에 오히려 들쭉날쭉하고 기울어짐이 심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만약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게 모사하여 시
남매 쌍둥이는 명이 짧아 일찍 죽게 된다는 말들이 있었다. 부부는 딸을 소매물도에 버렸다. 세월 따라 아들은 불쑥 자랐다. 어느 날 아들은 나무 하러 산에 갔다가 소매물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부모는 아들에게 '소매물도는 무서운 용이 사는 곳이니 절대 가서는 안 된다'고 신신 당부했었다. 여느 아들들처럼 아들은 부모 말을 가볍게 여겼다.금단의 과실일수록 유혹은 달콤하다. 마침내 아들은 소매물도에 건너가 물비린내 달큰한 처녀를 만났다. 첫눈에 반한 두 남녀는 정념을 못 이겨 서로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
서도(書道)는 비록 작은 도 이기는 하지만 그 도는 또한 모름지기 천하에 공인(公認)되어 대중과 더불어 공유(公有) 해야 한다. 지금 말하기를 “이 논설은 자식에게만 전해주고 감추고 숨기어 가보(家寶)로 삼을 수 있으나 여러 벗에게 말해서는 않된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요구하여 보고자 하면 나는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한다”라고 하니 그 마음 씀씀이의 거짓됨이 이 지경에 이르러 서결(書訣) 몇 폭을 가지고 왕융(王戎)이 복숭아 씨앗에 구멍을 뚫고 이가호(李賈胡)가 구슬을 감춘 것을 본받았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장군봉 아래에 몇 개의 바위굴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포진지. 저와 비슷한 인공 동굴을 제주도 송악산과 우도에서도 본적이 있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도 곳곳에 바다의 가미가제인 가이텐 자살 특공대(인간 어뢰)를 숨겨 놓기 위해 바위굴을 팠다. 산하에는 수 천 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을 깊은 상처가 남았다.1945년 3월, 진해 일본군 통제부에서 대한해협 방어를 위해 이 작은 섬에도 포진지를 구축했다. 포진지 공사에는 충청도에서 끌려온 광부들과 매물도의 당금, 대항, 소매물도 주민들이 강제 동원 됐다. 끌려온 사람들은
강요장(姜僥章)이 말하기를 “해서는 고르고 바른 것이 좋다”라는 말은 세속 사람들의 주장으로 당나라 서예가들의 잘못 된 인식 때문에 생긴 것이다.종요와 왕희지의 글씨는 산뜻하고 깨끗하면서 자유자재하니 어찌 고르고 바른 것에 구속 되었겠는가? 진실로 서판(書判)으로 관리를 뽑았기 때문에 끝내는 글씨가 과거의 습기(習氣)에 물들었으니 구양순(毆陽詢), 우세남(虞世南),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등은 글을 쓸 때 법도에 꼭 맞게 썼기 때문에 다시는 진의 서법이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모두가 인정할만한 평이라고 할 수
"또 모자랄까 두려워 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 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 일뿐. 그대들은 샘이 가득 찼을 때에도 목마름을 채울 길 없어 목마름을 두려워하진 않는가?"(칼릴 지브란) 나누지 못하는 것의 근원은 소유욕이 아니다. 불안이다. 모자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다 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누지 않고 자꾸 쌓아두려 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배낭 하나 메고 떠도는 삶이지만 나날이 배낭은 무거워진다. 밤늦게 진주에 도착했다. 타고난 길치인 까닭에 나는 몇 번씩 갔던 길도 헤매기 일쑤다. 진주라고 다를까. 택시를 탔다."남
한석봉은 글씨로 이름이 났지만 학식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가 쓴 팔결(八訣)을 보면 한 획도 법도에 가까운 것이 없을 뿐만이 아니니 곧 측(側)을 하면서 점을 찍고 난 뒤 아래를 향하여 획을 굽혀버려 필법을 만든 의의를 상실하고 있으며 또 륵(勒)은 가로로 길게 긋지 않고 짧은 획을 그어 노(努)획과 이어 내려가게 하였다.대저 륵(勒)은 “천리에 구름이 일어나듯 긋고 누애머리 모양으로 시작하며 말발굽 모양으로 끝맺어야 한다”는 것이 용필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것인데 이것이 없이 무엇으로 팔법(八法)을 갖추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는 뭐 바닷가하고 산이니 구경할 데가 별로 없어요. 밥은 사자셨소?" "예, 할머니. 할머니는 여기가 고향이세요?" "등 너머. 대판이라고, 여서 멉니다. 산 넘어야지. 옛날에 이 마을로 시집 왔습니다. 전엔 거기도 많이들 살았는데 지금은 안 삽니다. 여도 이젠 빈집이 많아. 좋은 학교도 있었는데 다 뿌사져 빌고."이 외진 섬에서 할머니는 또 어떤 세월을 살아오셨던 것일까."밭 일 하고, 옛날에는 밭 메고, 베 짜고, 삼 삼고, 모시 삼고, 배 짜. 옛날에는 옷을 호빡 길쌈 해가 안 해 입었습니까. 보리 갈아 도구
해서(楷書)는 크기가 작지만 왕희지의 서첩 가운데 아름다운 모본(摸本)은 큰 글씨인데 예학명(瘞鶴銘)과 마애비(磨厓碑)의 선본(善本)에서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또 전서에서 팔분 예서가 되고 해서가 되었으니 두가지길이 있을 수 없다. 원상(元尙)의 해서는 더욱 옛 것에 가깝기 때문에 자체와 획의 형태가 모두 팔분 및 예서에 가까우니 어찌 글자체와 획의 형태가 모두 비슷한데 운필의 묘(妙)만 같지 않을 수 있겠는가?여기에서 지금의 탁본에 길굴한 필의가 없는 것은 모각(摹刻)한 것을 거듭 모각한 지가 오래되어 참 모습을
연화세계를 알려거든 부처님께 물어보라 두미도는 통영시에서 남서쪽으로 34㎞ 해상에 있는 섬이다. 두미도의 남쪽에는 갈도(葛島), 동쪽에는 노대도와 욕지도가 있다. 섬은 크게 두미북구와 두미남구로 나누어진다. 두미북구에는 설풍리·고운리·학리·사동이 있고, 두미남구에는 구전·청석·대판 마을이 있다. 두미도는 면적 5.023㎢, 해안 선 11km의 작은 섬이지만 섬의 산은 높다. 섬 중앙의 천황산은 467m나 된다. 천황산 기슭에 마을들이 위태롭게 들어 서 있다.두미 북구 마을도 급경사에 집들이 층계마다 서 있는 형국이다. 마을을 오르는
그가 전서 주서 팔분서, 예서의 사이에서 비슷한 예를 구하고 벌래 먹은 잎, 올챙이 등에서 비유를 취했다는 것은 획을 그을 때 오로지 구불구불하게 펼쳐 움직이는 것을 숭상 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또 말하기를 “매번 글씨를 쓸 때에는 열 번은 느리게 다섯 번은 빠르게 열 번은 굽게 다섯 번은 곧게 열 번은 필봉이 숨게 다섯번은 노출되게 열 번은 세우고 다섯 번은 눞혀야 글씨라고 말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여기서 곡직(曲直)라 기복(起伏)의 오묘함에 대하여 말한 것이 또한 분명하고 또, 바른 그냥 운필해 나가 빠르게 쓰
우도는 연화도와 지척이지만 정기선이 없다. 민박집 배를 빌려 타고 우도로 건너왔다. 자는가 싶던 바람이 다시 거세진다. 파랑이 일고 먼 바다에 나갔던 작은 어선들은 서둘러 포구로 돌아온다. 우도를 둘러보고 두미도로 갈 생각인데 바람 골 터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배가 뜰 수 있을까. 폭풍주의보는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 부는 날 바다는 예측불허다.바다처럼 섬살이도 늘 예측불허. 우도의 주민들은 대부분 고개 넘어 움푹 파인 분지 안에 둥지를 틀고 산다. 뱃머리 선창가에는 몇 채의 집들만 다닥다닥 붙어 있을 뿐. 초입의 컨테이너 박스는